‘쌀’에 대해서 언어의 뿌리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농경문화와 관련된 단어는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인도어에는 쌀과 관련한 단어가 많다. 북 인도 힌디어로는 쌀을 ‘짜왈’이라고 하며 밥을 지은 후에는 ‘받(바-ㄷ)’라고 한다. 요새는 밥을 짜왈이라고도 한다. 남 인도에서는 껍질을 벗기기 전의 상태(paddy)를 ‘아리(ari)’, 껍질 벗긴 쌀알은 ‘아리씨(arici , areci)’라고 한다. 동인도 콜카타 밑에 있는 오리싸 주의 명칭이 arici라는 쌀의 의미에서 왔다는 견해가 있는데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남인도의 뱅갈루루가 속한 카르나타카 주의 kannada말로는 껍질을 벗긴 쌀, 곡류를 ‘아끼 (akki)’라고 한다. 우리가 어릴 때 경기 지방에서 농부들이 ‘아끼바리’라고 부르는 쌀이 있었다. 통일벼의 등장으로 밀려났는데 ‘아끼’라는 단어가 쌀의 뜻으로 남인도어에 있는 것은 흥미롭다. 아끼바리는 秋晴(あきばれ : 아끼바레)이라는 품종으로 60년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품종이라고 백과사전에 나온다. 아리시오(Arysio Nunes dos Santos)의 드라비다어 어원을 살펴보면 ak는 young rice 이고 al은 person 이다. 따라서 akal은 ‘어린식물, 어린아이’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아가, 아기’와 연결시켜 볼 만 하다. 타밀어로 쌀을 뜻하는 단어는 강한 ‘s’ 발음의 ‘쏘루(soru)’가 있고 밥은 빠탐(patham), 밥알은 ‘빠루까이(parukkai)라 한다. 쌀과 관련해 남인도 드라비다족 역사에 매우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남인도에는 촐라나두(Cholla Nadu), 체라나두(Chera Nadu), 빤디야(Pandhya) 라는 3개 국가가 있었다. 촐라나두는 남인도 동부의 타밀나두에서 최대의 쌀농사 경작지인 코베리 강 유역에 있었고, 체라나두는 남인도 서부의 께랄라주 일대, 빤디야는 남인도에서 스리랑카를 바라보는 칸냐꾸마리 일대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촐라나두인데, 타밀어에서는 촐라나두를 쏠라나두 또는 쏘라나두 (ssora nadu)라고 발음한다. 영국인들이 영어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강한 ‘s’ 발음을 표기할 영어자음이 없어서 ch로 표기했다고 한다. 현재 첸나이에 있는 촐라쉐라톤 호텔을 타밀인들은 대부분 쏠라쉐라톤으로 발음한다. 께랄라 지역에 있던 체라나두도 쎄라나두로 발음한다. 이 쏘라나두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 ‘쏠라’는 태양, ‘나두’는 나라의 뜻이므로 ‘태양의 나라’라고 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주장으로 ‘쏘라’는 쌀, 나두는 나라로 보아 ‘쌀의 나라’라는 견해가 있다. 필자의 타밀어 가정교사를 했던 일랑고 씨는 ‘쏘라나드 쏘르(rice) 우다이뜨’라는 오래된 타밀 속담(?)을 알려주면서 ‘쏠라(나두)’는 ‘쌀’이라는 뜻을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Chozha에서 zha는 영어의 la처럼 발음된다. zha는 목에서 약하게 ‘라’라고 발음하며, la는 입의 앞쪽에서 강하게 발음하면 구분이 된다. 타밀나두의 하층민들이 길거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먹는 음식 중 쌀로 지은 밥을 ‘쏘르’라고 한다. 쌀과 관련한 단어들 중 우리 어원과 관련이 있을만한 것을 추가해 보자. 요즘은 많지 않지만 예전에는 밥 먹을 때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볍씨 상태의 낱알을 흔히 보았는데 이것을 ‘뉘’라고 한다. 타밀 말로는 ‘넬(nel)’이라고 한다. nel : rice in the husk, 즉, 껍질이 벗겨지지 않은 쌀알 즉 볍씨 상태를 말한다. Toda어에서는 nes라고 하며, Kannada어로는 nel, nellu라 한다. 타밀어에서는 우리말 의 ‘벼’를 ‘빠이르(payir)’라고 하며 ‘비에, 비어’라고도 한다. 처음 벼를 심는 것을 우리말로 ‘모’낸다고 하는데 타밀인들은 ‘모’를 ‘무디’라고 한다. 또한 우리말로 곡식 알갱이 하나하나를 ‘낱’알 이라고 하는데 타밀어로는 낟-뚜(뜨)(Naaththu) 또는 나-루(Naarru)라고 한다. th가 r 로 발음되는 현상은 타밀어에서는 매우 흔하다. 첸나이 시내에 ‘아디야르’라는 지명이 있는데 영어로는 adiyar로 써 놓고는 보통 ‘아리야르’로 발음한다. 영어의 워터를 ‘워러’로(t를 r로) 발음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쏘르(쌀) 라는 단어 외에 뉘, 벼, 모, 쌀, 낱알, 아끼바리 등의 흔적이 우리말과 흡사하며, 역사에 나타나는 국가명에도 쌀이라는 흔적이 있다는 점을 볼 때 ‘쌀’이라는 우리말이 인도어에서 왔든지 혹은 우리말이 인도로 갔든지 간에 같은 뿌리를 가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어릴 때 시골에 가면 논에서 메뚜기를 잡기도 했다. 2002년 경 ‘인도코리아’ 웹싸이트에서 김영옥님이 남인도인들이 메뚜기를 ‘메뚜’라고 한다고 가르쳐준 기억이 난다. 아궁이 Agni는 죽은 자를 저 세상으로 데려 갈 때 ‘앞에서 불을 밝혀 인도’하는 신의 이름이라는 것은 스리니바산에게 들었다. 브라만 계급인 그는 매일 아침 1시간 정도씩 경전을 외우는데, 경전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들은 이야기다. 그들이 외우는 베다 중에 Agni라는 신의 이름이 나오는데 불이라는 뜻이 있어서 발음상으로 우리말 아궁이와 연결시켜 보았다. Ag는 베다에서 죽은 자를 저승으로 앞에서 인도한다는 뜻이 있다. 즉, ‘앞’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 사투리 중에 ‘아게’라는 표현이 관련될 수 있다. 이처럼 베다 같은 경전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잘 살펴보면, 생각지도 못한 우리말과의 관계를 찾아낼 수 있다. ‘아그니’가 혹시 ‘아궁이’라는 뜻으로 쓰이는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아그니’로 발음하지 않고 ‘아궁이’로 발음하면서 혹시 아느냐고 하였더니 ‘불 피우는 장소’(place for fire)를 물어보는 것이냐고 되물으면서 자기들도 불 피우는 장소를 ‘아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발리는 오래 전부터 인도인들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힌두교도가 다수가 된 곳이다. 이곳의 가장 큰 화산 이름이 아궁산이다. 마두라이 = 맏 + 우라이 남인도 타밀나두 주의 남부 중심지 마두라이는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이었고 실제로도 예부터 타밀남부의 중심지였다. 어원을 분석해보면 ‘맏+우라이 = 마두라이’가 된다. 여기서 ‘맏’은 우리가 ‘큰’아들을 ‘맏아들’이라고 하는 점에서 ‘맏ㆍ맏이’를 생각해 낼 수 있다. 타밀어로 나이가 가장 많다는 듯을 mootha, mud, mut으로 표현하며 mudi라고도 한다. mudi는 현대 타밀어에서는 머리카락이라는 뜻도 가지는데 d를 r로 발음하므로 무리, 머리로 발음된다. 여기서 우라이는 우르, 울, 울(타리), 오르, 부르, 뿌르, 뿌리, 뿌람, 벌 등처럼 마을이나 넓은 평야에 사람이 사는 곳을 표현할 때 뒤에 붙는 접미사다. 인도의 유명한 핑크빛 도시 자이뿌르, 007 영화를 찍었던 곳으로 유명한 호수 한가운데의 궁전호텔 우다이뿌르, 한국대사관이 있는 델리의 차나키야뿌리, 남인도 소프트웨어산업의 중심지 방갈루루(우르), 옹고르, 화려한 궁전으로 유명한 마이소르, 바닷가 백사장에 있는 사원으로 유명한 타밀나두의 마하발리뿌람, 우리 불교계에서 향지국으로 언급됐고 KBS가 촬영해가서 유명해진 타밀나두의 사원도시 깐치뿌람 등에서 보듯이 오르, 우르, 뿌르, 뿌람 등은 우리말의 마을, 우리, 울, 벌 등과 대응할 수 있다. 드라비다어의 palli는 촌락이라는 뜻인데 산스크리트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드라비다어와 우리말의 친근성을 주장하는 K. Menges는 인도 칸나다어(드라비다어의 일종)에서는 p가 h로 변화하거나 소멸하는 현상이 있다고 한다. 뿌르, 뿌리가 우르, 우리가 된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부 학자는 북인도 지역의 뿌르 라는 지명은 드라비디안이 북인도를 지배할 때의 흔적이 남은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드라비다어 palli가 산스크리트어에서 온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삼국유사의 향가 처용가에서 ‘셔블’은 고려가요에서는 동경(東京)으로 나온다. 고려때는 개경(開京)이 수도이므로 과거 신라의 서울인 경주를 우대해 동쪽에 있는 수도라는 의미로 동경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그런데 한자어의 東君(동군)은 해. 태양(太陽)의 뜻을 가지므로 동은 태양의 뜻을 가진다고 볼 수도 있다. 동쪽은 아침에 해가 뜨는 곳이니 과거에는 ‘동 = 해 = 아침 = 새로운’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서라+벌을 해뜨는 마을, 동쪽 마을로 보고, 힌디의 수라 + 벌 로 보면 안 될까? 수라, 즉, 인도어 수-ㄹ야(su-r ya, su-r y)는 해(태양)이고, 인도어 오ㄹ, 우ㄹ, 울, 우리, 뿌르, 뿌리, 뿌라, 벌은 마을 또는 도시의 뜻이다. 따라서 인도어 수-ㄹ야 + 뿌르, 수-ㄹ야 + 뿌리, 수-ㄹ야 + 우ㄹ 등은 태양마을, 태양도시라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힌디로 도시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는 샤하르가 있다. 아침이라는 의미의 힌디 단어 사베르도 있다. 좀 더 연구를 할 필요가 있지만 이것은 신라의 서라벌과 대응시켜 공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백제의 사비, 소부리는 물론 그 이전의 부여국의 이름도 같은 선상에서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영대교(永代橋)는 그냥 영대교가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물금과 양산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이었기 때문에 지역의 발전상을 시대별로 보여주는 산 증인이 됐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유생들이 다녔던 영남대로는 동래에서 출발해 물금의 황산잔도를 넘어가야 했다. 또 교통과 지방행정의 구심이 되는 역참(驛站)이 물금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경부선 철도가 놓이고 물금역이 생겨났다. 그 시대에 물금은 양산(지금의 원도심 지역)보다 더 활발한 곳이었다. 영대교를 건너면 처음 만나는 동네가 교동이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교동에는 향교가 있다. 19세기 초에 향교가 설치됐는데 이전에는 교리마을 이름이 곡포(曲浦)리였다. 당시 이곳은 지금과는 달리 춘추원 앞쪽으로 S자 모양으로 옴팍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 곡포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곡포에서 읍내로 나가는 길목에 하천을 건너는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곡포다리라 했다. 옛 문헌에 따르면 매번 큰물이 있을 때면 다리가 휩쓸려 가곤 해 주민들이 동원돼 복구하곤 했다고 한다. 그만큼 위험하기도 해서 행인을 업어서 건네주는 월천(越川)꾼이 있었다고도 한다. 곡포교를 한자로 풀어쓰면, 포(浦)는 개 포자(字)로 물가를 뜻하고, 교는 다리를 말한다. 즉 풀어쓰면 곡개다리가 된다. 이것이 후일 변해서 ‘국개다리’가 된 것이다. 양산이나 물금이 고향인 사람들은 어릴 때 한 번은 ‘국개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놀림을 받은 기억이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는 통나무 교각 위에 흙과 자갈을 덮어 길을 만들어 자동차와 사람이 다녔다. 해방 이후 1949년 3월에 나무다리를 철거하고 콘크리트 교량을 만들어 영대교라 이름붙였다. 국개다리에서 영대교라는 현대식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요즘처럼 튼튼한 다리는 못 되었다. 몇 번의 재해를 입는 등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해 교량 상판을 다소 높인 형태로 1983년 재가설됐다. 이 또한 신도시 건설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면서 다리를 이용한 교통량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2009년 현재의 왕복 6차선 교량으로 다시 태어났다. 설계공모를 통해 예술적이고 기능적인 초현대식 교량이 놓이고 인근의 음악분수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고 있다. 영대교에서 남쪽으로 양산천을 따라 내려가면, 양산역 인근에 큰 보(洑)가 설치돼 있다. 신도시 조성 전 수백만평에 달하는 메기들 너른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보 인근에는 하천 양 옆으로 너른 공터에 수양버드나무가 늘어져 아이들이 놀기에 그저그만이었다. 일명 낙차라고 했는데 1950~60년대 어린시절을 보낸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낙차에 나가 제방 언덕에 소를 풀어놓고 자맥질로 여름 한나절을 보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더러 투망을 잘 하는 형들이 잡아온 은어나 피라미들로 양푼이에 추어탕도 끓여먹곤 했다. 영대교 건너에는 오래된 교육시설인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시민공원인 춘추원은 변변한 휴식공간이 없었던 1900년대 시민들에게 유일한 쉼터요 나들이터였다. 낙차와 더불어 읍내 학교들의 소풍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동안 수 차례의 정비사업으로 다양한 편의시설과 순국선조 추모시설이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삼조의열이 유일했다. 해방 후 민족사관이 절실했던 시대상에 따라 우리 고장에서도 춘추계가 조직돼 유지와 선비들이 모여 충렬의 선조 비를 한데 모아 단을 만들었다. 신라 삽량주 간(干) 박제상 공, 고려의 김원현 양주 방어사, 조선 때 군수 조영규 등 읍내 여기저기에 방치돼 있던 삼조의열(三朝義烈)의 비(碑)를 옮겨 장충단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 삼조의열단 뒤로 조금 올라가면 한국전쟁 전몰군경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최근 들어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주축이 된 양산향토사연구회(나중에 문화원 산하로 들어가 향토사연구소로 명칭을 바꿈)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기록과 유적을 찾아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 삼조의열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의 공신, 항일독립운동유공자들까지 정리해 위패를 합동 보관하는 충렬사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양산시가 20억원 가까운 예산을 지원해 춘추원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백로봉 위쪽에 사당과 재실 등 5동의 건물을 축조하여 모두 70위의 위패를 봉안하게 됐다. 이로써 교동은 향교와 더불어 충렬공원까지 완비됨으로써 명실공히 양산의 문화적 뿌리로 거듭나게 됐다.
제42차 본지 지면평가위원회 회의가 지난달 28일 본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는 노상도 위원장을 포함한 9명의 위원과 본지 박성진 편집국장이 참석한 가운데 총 8회분 (485호 7월 2일자~492호 8월 27일자)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다. 이날 위원들은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한편 지역 정론지로서의 책임감을 요구했다. 특히 정론직필의 자세를 요구하며 앞으로도 언론의 사명을 다해 양산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하는 신문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리고기의 영양 오리고기는 사람의 신체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필수아미노산과 무기질, 비타민C, 비타민E, 비타민 B1, 비타민B2, 칼슘, 인, 철, 칼륨 등 양질의 광물질 함량이 높아 공해시대 최상의 영양공급원임을 의미한다. 오리고기 100g을 먹었을 때 섭취되는 단백질은 쌀밥의 6배에 달하고, 비타민은 닭고기의 3.35배나 많으며 무기질 함량도 타 육류이 비해 두 배 이상 높다. 곡류를 주로 한 우리 식생활에 꼭 필요한 우수식품이며, 건강보양음식 중 으뜸이라는 것이 현대 영양학의 결론이다. 효능 - 고혈압, 중풍, 토담, 토혈이 있을 때 - 아편, 갈근, 수은, 비상, 알콜 등의 중독에 - 빈혈증, 폐병, 신경통, 허약체질, 비만증, 병후회복에 - 관절염, 신장염, 각기병, 부인병, 피부병의 예방과 치료에 - 식은땀, 위장염, 양기부족, 정력이 약할 때 현대 의학에서 밝혀낸 오리의 효능은, 육류중 유일한 알카리성 식품으로 산성 체질을 알카리성 체질로 변화시켜 질병예방에 효과가 있고, 수용성의 불포화 지방산을 다량 함유해 피부노화 방지와 비만예방에 효과가 있으며, 리놀산, 리놀레인산 함유하고 있어 콜레스트롤 형성억제 및 원활한 혈액순환 촉진 기능이 있다. 오리고기와 궁합이 잘 맞는 식품 빈혈이 있을 경우 오리고기 궁합 빈혈이 있을 경우 그냥 오리고기보다는 오리 고기와 전복을 국으로 함께 끓여서 먹으면 좋다. 갑자기 어지러운 증상 등이 있을 경우나 얼굴이 창백할 경우, 숨이 가빠질 경우 오리고기와 전복 요리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 호흡기 질환이 있을 경우 오리고기 궁합 기침이 심할 경우 오리고기와 돼지족발을 함께 먹고 호흡기가 안 좋은 분들은 동충하초와 오리고기를 함께 끓여 국물을 먹으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혈액이 부족할 때 오리고기 궁합 혈액이 부족한 분들의 경우 오리고기를 구기자와 산약, 당귀를 넣고 국물을 먹으면 혈액 보충에 도움이 된다고 하며, 어지러움이나 귀울림증 및 수족의 저림 등의 증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유황과 오리고기 궁합 유황오리는 근골격계를 강화시키고 체내 해독작용에 좋으며 무릅 관절의 통증 폐경기 여성에게 좋다. 단호박과 오리고기 단호박과 오리고기가 만나면 달콤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잘 어울리며, 단호박에 있는 여러 가지 약리작용과 융합되어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 부추와 양파 오리고기는 찬 성질을 가진 식품으로 더운 성질의 부추와 양파와는 아주 잘 어울리므로 곁들여 먹으면 좋다 . 궁합이 잘 맞지 않는 식품 염소고기의 지방은 인체의 체온보다 응고점이 높고 오리지방과는 서로 대립상태에 있기 때문에 같이 먹지 말아야 할 식품이며 소고기와도 피하는 것이 좋다. 자두 또한 화학반응이 매우 강하여 닭, 오리 등 조류음식과 같이 먹게 되면 식중독 위험이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오리는 찬 성질을 가진 식품으로 팥빙수, 아이스크림, 냉면 같은 찬 식품이나 찬 성질을 가진 음식과는 서로 맞지 않는다. - 과식하여 체한 기운이 있거나 설사가 있을 때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 감기로 기침을 하거나 만성기관지염, 가래가 있는 사람은 주의 하여야 한다. - 생리통이 있는 여성도 오리고기의 찬 기운이 좋지 않으며 몸의 기운이 찬 사람도 피하는 것이 좋다. 참고문헌: 동의보감, 갈하구방, 한약집성방, 동의학사전, 중국약대전
김 씨는 23년간 원도심의 흥망성쇠를 지켜봐 왔다. 90년대 양산의 중심 번화가였던 시절부터 터미널 이전 후 쇠락해 가고 있는 모습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이웃 가게들이 하나 둘 씩 망해가는 모습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소위 ‘잘 나가던 시절’의 기억만 붙잡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김 씨는 상권이 바뀐만큼 가게도 바뀌어야 한다는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몇몇 이웃 가게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신도시에 손님들을 뺏겼다고 화만 내고 있으면 안돼죠. 같은 가격과 같은 제품, 같은 실력이라면 손님들은 당연히 편한 곳으로 가죠. 주차시설, 냉난방시설 등 시설이 좋고 접근성까지 좋은 신도시에 손님들을 뺏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예요” 때문에 원도심은 싼 가격, 차별화된 제품, 좋은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 정말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힘들다면 고객응대법, 즉 서비스 마인드라도 바꿔야 한다. “아직도 어떤 가게는 아침에 손님이 물건을 바꾸러 왔다고 ‘아침부터 재수없게…’라며 불친절하게 응대해요. 5살 꼬마손님에게도 ‘어서 오세요, 고객님’하는 요즘 세상에 이런 생각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터미널 이전 이후 양산시가 상권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간판정비 사업, 남부시장 시설지원 등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업체 스스로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과연 원도심에 ‘봄날’이 다시 올까요? 저는 솔직히 비관적이에요. 과거와 같은 모습은 찾기 어렵다고 봐요. 원도심은 더는 상권에 기대 영업해서는 안돼요. 모두가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자구책을 찾는데 노력했으면 해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의사가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구둣방을 찾아갔다. 구두수선공은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뒤축을 갈거나 꿰맨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구두를 돌려주며 “2천원만 주시오”라고 했다. 의사가 버럭 화를 내며 “거 참, 고치지도 못하면서 뭔 돈을 받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의사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당신도 병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꼬박꼬박 진찰비는 받지 않소?”
1976년 대학 1학년 때 처음 힌디어(語)를 배우면서 교수님께 힌디가 혹시 우리말의 뿌리는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했었다. 그때 교수님으로 부터 ‘쓸데 없는데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핀잔만 들었다. 그후 대학을 졸업하고 코트라에 입사해 인도 뉴델리 무역관에 발령받아 가기 전까지 힌디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사실 인도에서는 힌디어를 한마디도 못해도 지낼 수 있다. 특히 비즈니스는 인도인끼리도 영어로 한다는 이야기를 코트라 선배들에게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힌디 책은 인도 가는 날까지 들쳐보지도 않았다. 1990년 3월 31일 인도에서 첫 아침을 맞았다. 인도는 서울보다 3시간 반이 늦어서 새벽 다섯시도 되기 전에 눈이 떠졌다. 마침 같이 잠이 깬 집사람이 조용히 해보라는 시늉을 하면서 멀리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누가 한국 방송을 틀어놓은 것 같다고 했다. 마침 뉴스시간대였다. 언뜻 들으니 우리말 방송 같기도 했으나 귀를 기울이니 힌디 뉴스였다. 집안일하는 인도인들이 새벽부터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은 것이었다. 인도어는 우리말의 뿌리? 이때 언뜻 15년 전 힌디와 우리말이 같은 뿌리 아닐까 하던 나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힌디를 전혀 모르는 집사람이 우리말 아니냐고 물었던 것도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해 여름 한국에 출장 갔을 때 힌디사전과 한국어 어원을 연구한 책들을 10여권을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 틈틈이 우리말과 인도어의 유사성을 찾아보았다. 특히 친족 간 호칭, 신체, 농업 등 생활 속의 비슷한 기초단어를 찾는 것으로 나의 긴 여정은 시작됐다. 1993년 잠시 귀국했다가, 1996년 10월 또 다시 남인도 첸나이 무역관장으로 발령받아 나갈 땐 관련 책 등 보다 많은 준비를 해가지고 갔다. 1997년 1월부터는 타밀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석사 출신 일랑고를 매주 두 번 무역관에 초대해 함께 공부하면서 우리말과 인도어를 비교해 보았다. 이때 북인도어 보다는 남인도어가 우리말과 더욱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호동에 있는 효암고등학교 채현국 이사장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신 분인데 평소 역사와 철학,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곤 한다. 채 이사장님은 인류가 과거 유목민 시절에는 언어 체계 속에 시간과 공간이 동일시 됐다고 주장하시는데, 그 근거로서 ‘녘’자를 드신다. 동녘, 서녘, 들녘의 ‘녘’자는 공간, 방향 또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새벽녘, 저녘, 해 저물녘 할 때의 ‘녘’자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녘’자가 시간과 공간에 같이 쓰인 것은 시공을 동일시하던 흔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목생활을 하던 당시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쪽 끝 만주까지 이동하는데 1년이 걸린다고 하면, 두 무리가 나뉘어 출발하면서 약속할 때 ‘만주에서 만나자’는 말이나 ‘1년 후에 만나자’는 말은 같은 의미였다는 것이다. 언어에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것은 농경생활을 하면서부터라고 하시는데 여러가지 부연 설명을 들어보니 참 일리가 있는 견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고대의 언어를 비교하고 유추해 보려면 역사, 철학, 종교 등은 물론 때로는 시공을 초월한 직관도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지금부터 이런 관점에서 인도어와 우리말의 관계를 살펴보자. 어순(語順)과 조사(助詞) 용법이 흡사 우리말과 남인도어는 역사의 어느 한 기간 동안 한국과 인도가 삶을 공유한 기간이 있거나 대규모의 종족집단 이주 등이 있었다고 해야만 가능할 정도로 기초어휘, 문법 등에서 흡사한 면을 보였다. 인도어와 우리말의 유사성을 언급한 학자로는 H.Koppelman, H.Guntert, A.Eckardt 등이 있고 헐버트 선교사와 K.Menges, Bouda는 우리말이 인도남부의 드라비다어와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북인도에서 공부한 것을 먼저 살펴보자. 힌디는 어순이 우리와 같을 뿐 아니라 주격, 목적격, 소유격, 여격 조사 등 ‘조사’ 용법이 우리와 흡사하다. 이점은 남인도 타밀어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전치사 용법과 대비하여 우리말의 ‘조사’용법은 후치사 용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타밀어는 거의 완벽하게 이 조사용법이 우리와 같다. <힌디> 이것은 무엇 이니? 야 끼야 헤? 이사람 누구 이니? 야 꼰 헤? 너(는) 망고를 먹었다. 뚜(네) 암 카야. 나는 람(을) 안다. 메 람(꼬) 잔따 훙 당신(의) 나라는 인도 다. 압 (까) 데시 바랏 헤. 나는 너(에게) 책을 주었다. 메 뚬(꼬) 끼땁 디야. <타밀> 너의 집은 부산(에) 있습니다. 운 비드 부산(일) 이르끼라드. 오랜만에 힌디 기초 문법을 공부하면서 영어나 중국어와 달리 우리말과 어순이 같고 특히 영어에 없는 조사용법이 우리와 같다는 점에서, 나를 흥분하게 했던 대학교 1학년 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엄마, 아빠, 아버지, 언니 남인도의 시골이나 빈민가에 가면 어린 아이들이 ‘엄마’하면서 자기 엄마한테 뛰어가 안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첸나이에서 근무하던 97년 여름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집으로 온 전화를 아들 정우가 받더니 ‘아버지 전화 왔어요’하고 나를 불렀다. 받아보니 주정부 산업부 차관 스리니바산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 물어본다. 너의 아들이 ‘아버지’하던데 그게 Father라는 뜻이냐? 그렇다고 하니 자기들도 아버지라고 부른단다. 나는 타밀어로는 ‘엄마’, ‘아빠’라고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니까 약간의 예를 갖추는 경우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다. 타밀어에서 엄마, 아빠, 언니가 발음과 뜻이 우리와 똑 같다는 것은 알았어도 아버지까지 같다는 것은 의외였다. 인도 남부 드라비다족은 엄마를 ‘엄마(암마)’,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거나 ‘아버지’라고 한다. 또한 오빠의 부인을 언니(안니)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와 같다. 오빠를 ‘안나’라고 하는 점이 우리와 다른데 ‘누나’라는 우리말이 어떤 힌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언어학자 몇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엄마, 아빠 같은 단어에서 구순음이 같다는 것은 대부분의 언어의 일반적인 현상이므로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인도와 한국처럼 멀리 떨어진 나라의 생활의 기초단어가 더욱이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간의 호칭이 대부분이 우리와 똑 같다는 것은 오히려 두 언어가 같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왜 가까운 중국인들이 엄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멀리 떨어진 남인도인들이 엄마, 아빠, 아버지, 언니라고 할까? 인도 남부에서는 어머니 신(god)을 Amman 신이라고 하며 이 신에게 바치는 공물을 ‘암만셀라이’라고 한다. 셀라이는 인도 여성이 입는 사리를 말한다. 문어체에서 대부분 단어 끝에 n을 붙이고 구어체에서는 n을 떼므로 amman은 amma(엄마)를 나타낸다. 요르단에 있는 신전 이름이 ‘암몬’ 신전인데 이 신전이 여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아파치’라는 호칭은 무엇일까? ‘엄마, 아빠, 아버지, 언니’라는 호칭만으로도 역사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삼랑진에서 낙동강 하류는 예부터 황산강으로 불리었다. 강 너머 김해 상동을 연결하던 나루가 있어 황산진(黃山津)으로 알려진 물금은 신라 때부터 자연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의 서부리 690번지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황산역(黃山驛)은 신라 소지왕 9년(487년) 우역제가 실시된 이래 수해로 훼손된 1857년까지 1천400년 동안 경상도 16개 산하 역을 관할하는 국가통치의 중요한 역할을 해온 곳이다. 황산역 터에서 낙동강을 끼고 계속 올라가면 삼랑진과의 경계인 작원관에 이른다. 이 길은 영남대로의 일부분인데 화제로 가는 길은 절벽 아래에 선반을 달 듯 나무로 난간을 만들어 통로로 이용했기에 잔도(棧道)라고 불렸다. 양산시에서는 ‘황산베랑길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구간을 낙동강변 자전거길로 조성했다. 원동면과 함께 서면으로 불리다가 상서면으로 분리된 물금은 1936년 물금면으로 개칭됐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리, 유산리, 어곡리를 당시 양산읍에 떼어 준 물금은 1996년 양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읍으로 승격됐다.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이 지금은 화려한 신도시로 변한 그곳엔 모두가 탐내는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낙동강의 범람으로 자주 물에 잠겨 메기들이 침만 흘려도 물에 잠긴다고 해 ‘메기들’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1900년대 들어 대대적인 경지정리를 통해 양산의 대표적인 농경지로 다시 태어났다. 당시 양산읍내에서 물금으로 가는 길목엔 종고개가 있었다. 지금의 범어리와 가촌리 경계 부근인 종고개는 메기들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청룡등이라는 야산을 끼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시대 메기들에 관한 민중의 역사가 담긴 비석이 발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1864년 조선 고종 때 일이다. 습지에 가까운 불모의 땅에 매년 과다한 농지세가 부과되자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관아에 탄원했지만 해결되지 않자 직접 한양으로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면세를 청하는 서류를 제출했다. 다행히 이를 받아들인 호위영 대장 정원용이 관할 군수와 관찰사에게 상세한 조사를 지시해 검토한 연후, ‘메기들에 대하여 영구히 면세하라’는 영을 내리게 된다. 양산향토사연구회가 주민의 제보를 받고 청룡등에서 발견해 복원한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는 바로 이러한 공직자들의 은공을 잊지 못해 메기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공덕비이다.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물금역이 개설되자 물금리 일대는 군 소재지보다 더 번성하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된 1970년대 이전, 특히 1950~60년대 부산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철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중ㆍ고등학교를 부산으로 유학 갈 수 있었던 것도 물금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제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철광석을 캐는 물금광산이 있었다. 지금의 물금취수장 쪽으로 내려가는 토교 아래 산비탈에 자리한 광산은 1960년대 초에 개발돼 연간 10만톤가량의 철광석을 생산하며 명성을 날렸지만 1980년대 들어 폐광되고 지금은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있다. 광산 인근에는 신라 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절경을 노래했던 임경대(臨境臺)가 있던 곳이다. 지금도 해가 질 무렵 이곳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 그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금의 옛 영화가 쇠락하게 된 것은 물금역의 기능이 줄어든 것과 궤를 함께한다. 도로교통이 양산읍내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역전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물금리 4개 마을은 기존취락지 보호라는 명분 아래 신도시 조성사업에서도 제외돼 낙후된 원도심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한다. 시에서는 정주권사업 등을 통해 자체 발전을 꾀하고 있지만 한번 밀려난 관심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물금 주민들의 애환은 지난 정부에서의 4대강 사업으로 증산 앞 하천부지의 농경지를 잃게 되면서 더욱 시름이 깊어졌다. 낙동강 하류의 치수사업으로 홍수도 거의 없어졌는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그저 일손을 놓게 돼 아쉽기만 하고 이것은 나중에 채소값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호텔외식조리업계 마에스트로 강무근 교수의 네임브랜드가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강 교수의 이름을 딴 양산대 요리경진대회가 규모도 실력도 월등히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16일 양산대학교(총장 장호익)에서 ‘제6회 양산대학교총장배 강무근 창작요리 경진대회’가 열려 미래 한국 요리업계를 책임질 꿈나무들의 재능과 창의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양산대학교 내 호텔외식조리과 실습실에서 진행된 이번 창작요리대회는 부산과 울산, 경남지역 조리특성화 고교 등 요리에 특기가 있는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36개팀, 110여명이 참가해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쳐냈다. 특히 이번 대회는 호텔외식조리과 강무근 교수의 이름이 붙은 세 번째 요리대회로 ‘제2의 강무근 조리사’를 꿈꾸는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매년 참여 학생 수가 증가할 뿐 아니라 실력도 월등히 성장해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회가 펼쳐졌다. 대회는 지정작품인 한식매작과 1점과 창작 작품 돼지고기 요리 1점을 제출해야 하며, 학생들은 주어진 1시간 20분 안에 모든 요리를 완성해야 했다. 대회 시작 전 강무근 교수는 인사말을 통해 “대회를 준비하면서 요리의 테크닉, 동료와의 협동심, 교사에게 감사하는 마음 등을 배웠을 것”이라며 “50년 조리사 외길을 걸었기 때문에 교수이기 이전에 참가학생의 조리사 선배로서 오늘 대회를 보겠다”고 말했다. 대회는 (사)한국조리사회중앙회 부산지회 서성갑 지회장을 심사위원장으로 하고 (사)한국조리사중앙회 경남지회 장용현 사무국장, (주)농심호텔 강도균 조리과장 등 모두 3명이 심사를 맡아 준비과정과 조리과정뿐 아니라 위생상태, 정리상태 등을 날카로운 눈으로 심사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돼지고기를 갈아 롤형태로 말아 찐 다음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요리를 선보인 배정욱ㆍ백상준ㆍ박성희 학생이 대상을 차지했다. 대상 학생들은 “평소 동경해 왔던 강무근 교수님이 있는 양산대 진학이 목표였는데, 대상수상자에게 입학금 전액이 면제된다는 것을 알고 대회출전을 결심하게 됐다”며 “돼지고기 창작요리 대회인만큼 지역특산물을 이용한 식재료에 착안해 작품성과 상품성을 살려 요리를 만들었던 것이 적중한 것 같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양산대는 “이번 대회 입상팀 전원에게 상장과 트로피, 조리용 칼세트 등의 부상을 비롯해 양산대학교 입학시 장학금 혜택도 주어져 진학진로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요리사의 꿈을 심어주기 위해 마련한 것이 벌써 6회를 맞이했다. 앞으로 전통이 있는 대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개최를 약속한다”고 말했다. 엄아현 기자 coffeehof@ysnews.co.kr
“조리사로서 인생의 목표를 가져라. 적당히 졸업하고, 적당한 곳에 취업해서 적당히 살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무대에 도전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50년 조리사 외길을 걸어온 강무근 교수는 ‘제2의 강무근’을 꿈꾸는 미래의 조리사들에게 이같이 조언했다. 강 교수의 드라마 같은 조리인생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초등학력으로 특급호텔 총주방장을 지내고, 32세에 중등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만학도의 꿈을 불태우며 52세에 대학교수로 변신, 후학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다. 강 교수의 이름을 딴 요리경진대회가 이토록 성황을 이룰 수 있는 이유다. “대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한층 성숙해 진다. 교실에서 실습을 통해 배우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대회를 통해 기술적인 테크닉을 쌓고, 또 다른 학생들의 실력과도 냉정히 비교해 봐야 한다. ‘프로페셔널’이라는 꼬리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강 교수는 13년째 양산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양산대 호텔외식조리과는 부산ㆍ경남지역 최초로 개설된 조리학과로 22년 전통을 자랑한다. 그동안 배출된 졸업생들이 7성급 호텔인 두바이 버즈알아랍호텔을 비롯해 부산롯데호텔, 울산현대호텔 등 국ㆍ내외 최고급 호텔과 외식산업체로 진출해 막강한 선배군단이 만들어져 있다. “인생의 롤모델을 만들어 선배의 발자취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도 좋은 배움이다. 그 선배를 넘어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순간, 조리사로서 당당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엄아현 기자
‘윤동균 한방쑥면’은 가게 인테리어가 조금 색다르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정면에 넓게 평상이 펼쳐져 있다. 평상 위에는 식탁이 놓여 있고 모서리 기둥에는 넝쿨이 자라고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인데 어딘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시골 원두막을 떠올리며 만든 겁니다” 윤 대표의 설명을 들으니 ‘아~’하고 수긍이 간다. 실내다 보니 실제 원두막과 같을 수야 없겠지만 원두막 ‘흉내’ 정도는 내고 있다. 윤 대표는 원두막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관리하기 어려운 넝쿨을 벌써 6년째 키워오고 있다. 정성이 없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해 관리도 본인이 직접 한다. 덕분인지 넝쿨은 울창하진 않지만 조화로 오해받을 정도로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왕 손님들이 오셔서 드시는 음식, 그것도 시원함을 느끼기 위해 찾아오신 손님들인 만큼 그런 느낌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옛날 시골 원두막에서 시원한 국수 한 그릇 말아먹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느꼈으면 해서 생각해 낸 인테리어죠. 시골풍경, 소박한 국수 한 그릇의 정취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실제 손님들이 ‘원두막 국수 한 그릇’의 느낌을 받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시원한 쑥면 한 그릇으로 더운 속을 달래고 푸른 넝쿨 잎으로 무더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인테리어 하나에도 손님들의 추억을 생각하는 윤 대표의 마음. 시골 원두막 국수 한 그릇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윤동균 한방쑥면’에서 시원한 쑥면 한 그릇 즐겨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항상 염려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름. 무더운 날씨에 땀도 많이 흘리고 그만큼 기운도 빠지기 마련이다. 잘 먹는 게 곧 체력. 불볕더위가 몰려오면 의례적으로 사람들은 ‘보양식’을 찾기 마련이다. 삼계탕은 복날이면 필수음식이 됐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보신탕 역시 여름이면 빼놓지 않는 보양식이다. 이들 보양식 못지않은 인기 음식이 있다. 바로 시원한 음식의 대명사인 밀면과 냉면이다. 삼계탕과 보신탕이 여름철 떨어진 기력을 보강하기 위한 ‘보양식’이라면 밀면과 냉면 등은 시원한 국물로 입맛을 자극하는 ‘별미’라 할 수 있다. 20년. 덕계동에서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밀면을 만들어 온 사람이 있다. 윤동균(56) 씨 이야기다. 서른여섯 나이에 처음 밀면 가게를 열고 고군분투 끝에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가맹점만 6개를 운영하는 ‘대표’가 됐다. 물론 처음부터 ‘윤동균 한방쑥면’이란 이름을 내걸 만큼 장사를 잘하거나 맛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산과 들 모기 물려가며 쑥을 뜯고, 밤에는 녹즙기와 씨름하고 눈물 흘리며 양파를 까서 양념 담고…” 무슨 한 맺힌 이야기가 아니라 윤 대표가 본인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3월. 땅 위에 봄철 식물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윤 대표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앞산 뒷산 가릴 것 없이 온 동네 산과 들을 헤맨다. 목적은 단 하나 쑥을 캐기 위해서다. 짧게는 하루 4~5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 쑥을 뜯는다. 6월이 쑥 채집이 끝날 무렵이면 마음은 더욱 바빠진다. 마음만큼 쑥을 캐는 손놀림도 바빠질 수 밖에 없다. 넉 달 동안 캔 쑥으로 1년 장사를 해야 하니 봄철 윤 대표의 하루는 1초가 아까운 것. 고혈압 치료목적으로 시작한 ‘쑥면’ 윤 대표가 쑥면을 개발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다. 윤 대표는 사실 고혈압 환자였다. 집안 내력이다. 윤 대표가 밀면 가게를 열고 일에 집중할수록 몸은 고단했고, 고혈압의 위험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혈압에 푸른 은행잎이 좋다는 말을 들은 윤 대표는 곧장 은행잎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은행잎이) 1kg에 30만원씩 했어요. 너무 비쌌죠. 그래서 은행잎 대신 다른 건 없을까 고민하다 쑥을 떠올렸죠. 그런데 쑥이 몸에 이만저만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미친 듯 쑥을 뜯으러 다녔죠. 그리고 항상 쑥을 먹기 위해 쑥면을 개발하고 쑥막걸리도 연구한 거죠” 이렇게 자신의 고혈압 ‘치료용’으로 개발한 쑥면이 의외로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갈근(칡뿌리), 천궁, 당귀, 계피, 감초, 생강, 마늘, 양파, 구기자 등 온갖 재료를 넣어 만든 육수도 사람들의 입맛을 유혹했다. 물론 처음부터 사람들로부터 ‘맛있다’는 평가를 들은 건 아니다. 무조건 많이 넣으면 좋을 것이란 생각에 재료를 아낌없이 썼다. 하지만 음식이란 게 풍성한 재료만큼 재료 간 적절한 ‘조화’가 뒷받침돼야 하는 법. 손님들은 ‘쑥 향이 너무 진하다’, ‘한약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윤 대표는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쑥을 기본으로 맛과 기능(건강)이 어울리는 재료를 찾기 시작했다. 칡, 구기자, 생강 등 약재들이 하나씩 추가되기 시작했다. 무수한 반복 끝에 최적의 비율을 찾을 수 있었다. 이후 ‘윤동균 한방쑥면’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승승장구 하던 윤 대표의 음식점도 최근 암초에 걸릴 뻔했다.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밀면 집에서 사용하는 육수를 분석했는데, 대부분의 가게에서 ‘가짜육수’를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밀면, 냉면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윤 대표는 방송이 나가자 즉시 육수 제조법을 공개했다. 자신의 비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육수는 먼저 돼지 뼈를 3일간 고우고 뼈를 걸러내 … (중략) … 천일염으로 간을 하고 보리새우를 넣어 3일간 끓여 7일간 농축한 후 희석해서 육수를 만든다” 단순 공개가 아니라 육수 제조과정을 꼼꼼히 적어 사진과 함께 가게 안에 걸었다. 비법이 노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육수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윤 대표의 생각은 적중했다. 비법 공개 후 매출이 지난해 같은 때 보다 1.5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연구 또 연구… 지금에 안주하지 않는다 윤동균 한방쑥면 본점에는 입구부터 각종 특허와 요리경연대회 상장 등이 즐비하다. 이런 상장들이 보는 이들에겐 단순한 ‘자랑’ 정도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윤 대표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윤 대표는 상장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상장 이면의 ‘노력’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저는 아직도 계속 연구를 합니다. 쑥면을 바탕으로 다양한 입맛에 맞출 수 있는 메뉴 개발이 20년간 손님들의 발걸음을 이끈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무냉쑥면과 들깨쑥칼제비는 최근 개발한 인기메뉴다. 열무냉쑥면은 쑥면에 시원한 열무김치가 가미된 신메뉴다. 새콤한 열무의 맛과 은은한 쑥향, 거기에 살짝 단맛이 나면서도 시원한 육수까지. 들깨쑥칼제비는 칼국수와 수제비의 중간 형태다. 손으로 뜯어낸 수제비의 투박함이 부담스러운 손님을 위해 손을 대신해 칼로 면을 빚어낸다. 들깨의 고소함까지 가미되니 식감과 향기까지 사로잡는다. 솔선수범의 3원칙. ‘언제 해도 할 일이면 지금 하자, 누가 해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어차피 할 일이라면 열심히 하자.’ 윤 대표의 좌우명이다. 이 좌우명이 윤 대표를 꾸준히 연구하게 만들고 그 노력이 결과를 이끈다고 윤 대표는 믿는다. 윤 대표는 식당 개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전했다. “제가 감히 조언을 하자면 요식업은 제조업이나 가공업보다 더 힘듭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음식에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스스로 힘든 과정을 겪지 않으면 손님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 훌륭한 음식이 어떤 음식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윤 대표는 “제가 만든 음식은 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만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과 정성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자신의 음식에 대해 “노력과 정성을 쏟아 거짓 없이 만드는 음식인데 이만하면 훌륭한 음식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는 윤 대표. “큰 욕심은 없다”면서도 서울에 체인점을 열고 싶다는 윤 대표의 꿈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끊임없는 연구와 정성을 다하는 노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교와 힌두교는 서양과 중동의 배타적인 종교관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관용적이다. 불교와 힌두교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면 다른 편으로부터 차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불교가 자신의 새 와인을 오래된 병에 넣듯이, 힌두교는 새 와인을 받아들이고 보전하기 위해 병을 다시 디자인했다”고 인도 학자가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자기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주변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인도인들의 생활 태도를 지켜 본 필자는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무슬림에 의해 해체된 불교 힌두교와 불교는 약 1천500년이라는 긴 공존상태를 지속하는 동안 몇 가지 차이점이 발생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불교는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는 승려집단(sangha) 시스템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7세기경 하르샤 왕조의 지원을 받은 날란다 사원(대학의 기능도 함)과 빨라 왕조의 지원을 받은 오단타뿌리, 비끄라마실라 사원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승려집단은 당시 사회를 유지하는 일종의 리더 집단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인도의 비끄라마실라는 이제 사라졌지만 비끄라마실라의 기능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티벳 승려단이다. 티벳 승려단이 현재 국가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인도에서 이들 승려집단의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비하르 일대에 있던 승려집단의 거주공간이자 수행하는 장소였는데, 10세기 이후 무슬림 침입자들이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곳을 파괴하고 승려집단을 해체함으로써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즉 도덕성이 붕괴됐거나 종교생활이 타락하여 불교가 쇠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마우리아 왕조시대의 행정언어는 쁘라크리트어(語)이다. 아쇼카 대왕의 기념비문이나 동판 등은 물론 불교 관련 기록들도 쁘라크리트로 쓰이다가 나중에 산스크리트어(語)로 바뀐다. 불교의 교리도 초기에는 중세 인도아리아어의 하나인 빨리어로 쓰였으나 기원 후로 넘어올 무렵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게 된다. 기원 후 500~1200년 동안 광범위하게 사용됐던 산스크리트어 역시 무슬림 시대가 시작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는데 이 역시 불교의 쇠퇴와 어느 정도의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암베드카와 불교의 부활 독립 이후 인도 불교에 대해서는 닥터 암베트카(Bhimrao Ramji Ambedkar : 1891년 4월 14일~1956년 12월 6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카스트에도 포함될 수 없는 아웃카스트, 즉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불가촉천민을 간디는 신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하리잔이라고 불렀고 남인도에서는 흔히 쓰이는 달리트(Dalit)라고 부른다. 암베드카는 천민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정부지원으로 해외에 나가 경제학 및 법학 박사를 받은 자로서 봄베이에 돌아온 후 카스트 폐지 운동에 앞장섰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하자 법무부 장관이 돼 인도헌법을 기초하였고, 이때 카스트 차별금지, 대학 및 공무원 자리의 일부를 천민에게 할당하도록 헌법에 명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으로도 인도 사회의 뿌리 깊은 카스트 차별은 사라지기 힘들다고 보고,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를 믿게 된다. 인도 중부 내륙 도시 낙뿌르에서 그가 수 많은 불가촉천민을 거느리고 함께 불교로 개종한 이후 거의 3백만명의 달리트들이 그를 따라서 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는 혁신적인 불교운동을 통해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을 이루었다고 평가되었으며, 후에 인도 국민으로서는 최고의 훈장인 Bharat Ratna를 받았다. 그는 사라진 불교를 현대에 되살린 새로운 불교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불교의 탄생, 쇠퇴, 부활 모두 카스트 차별과 관련 이처럼 불교의 탄생, 쇠퇴 그리고 부활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한가지 공통 요인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계급에 의한 차별이다. 힌두교 사회에서 카스트 계급에 의한 차별을 철폐하고자 평등을 이념으로 탄생한 것이 불교였다. 그리고 인도를 점령한 이슬람 지배층에 의해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 승려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쇠퇴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불교의 평등이념에 대해 반감을 가진 상층 카스트들의 역할도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피지배층의 리더그룹에는 불교 승려단뿐만 아니라 더 큰 힌두교 리더그룹도 있었는데 불교 승려단만 사라진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힌두사회 지배계층인 상위 카스트는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이 인도를 지배해야 하는 이슬람 지배계층의 생각과 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슬람 지배층은 힌두 지배층을 통해 인도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필요했고 힌두 지배층은 이에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때도 인도 사회의 기존 지배층인 상위 카스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통해 인도 하층민을 통치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불교의 부활 역시 암베드카에 의한 카스트 차별 철폐의 최후 수단으로서 불교로의 개종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결국 인도 불교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간의 대립 과정에서 탄생, 쇠퇴,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도시의 발전은 도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70년대 이전 평화로운 농촌지역에 지나지 않았던 양산이 불과 40년 사이에 경남도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산업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이 시발점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필생의 사업으로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추진한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착공해 불과 2년 6개월 만에 1970년 7월 전 구간 개통했다. 당시만 해도 국가경제 수준이 미약했고, 국가 재정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독일과 이태리 등 유럽 선진국을 둘러본 뒤 국가 기간산업으로 고속도로가 꼭 필요하다는 신념 아래 국회를 설득해 사업을 추진했다. 정주영의 현대건설을 비롯한 국내 굴지의 대규모 건설회사와 국군 공병부대가 구간을 분담하여 돌관작업을 한 끝에 완공했지만 그 이면에는 공사현장에서 많은 기술자와 근로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의 노선이 양산을 경유하게 된 데는 당시의 공업전진기지였던 울산과 천년고도 경주를 연결하기 위한 노선계획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보다 군세가 컸던 밀양 방향이 아닌 양산~언양~경주~대구 노선이 결정됐고 밀양은 한동안 침체기를 겪게 된다. 양산을 지나는 젖줄은 고속도로 외에도 두 개의 국도가 있다. 부산~강릉선인 35호 국도는 동면 호포에서 시작해 양산시내를 거쳐 하북면 신평으로 빠져나간다. 부산~온성선인 7호 국도는 동면 여락리에서 출발해 웅상, 용당동을 거쳐 울산으로 진행한다. 이 중에서 35호 국도는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부터 양산시가지를 관통하는 간선도로로 오랫동안 시민들의 발이 돼 왔다. 지금도 많은 시민들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빨간 버스’를 기억할 것이다. 부산 금정구 범어사 입구는 팔송이라고 불리며 양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동래에서 출발한 언양행 ‘빨간 버스’는 푸른 제복을 입은 안내양이 동승해 차비를 받았다. 노포동을 지나 동면으로 넘어오는 고개부터는 ‘마의 비탈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송 못 인근까지 고개를 넘어오는 동안 버스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 곡예를 하기 시작한다. 울퉁불퉁 노면에 계속되는 커브는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마저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게 했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게도 한다. 그런가 하면 거의 모든 구간이 비포장 자갈길이라 한번 버스가 지나가면 그 먼지는 앞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1990년대 말 양산시내에 소도읍가꾸기 사업이 진행되기까지 읍내 도로변에 위치한 집이나 가게는 그야말로 회색 가루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1970년 9월 16일 추석 다음날 동면 내송마을 인근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빨간 버스’ 한 대가 내송마을과 다방마을 중간쯤에서 내송천 하천으로 추락해 13명이 숨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고지점 주변에 마땅한 시설이 없어 면사무소 옆 폐교 교실에 13구의 시체를 안치하고 며칠간 공무원들이 보초를 섰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양산읍내를 벗어나 북정을 지나노라면 도로변에 넓게 자리한 들판에서는 철에 따라 푸른 초원이 되었다가 누런 황금들녁이 되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소토 쯤에는 당시 유명한 옹기굴이 있었다. 고을 주변에서 필요로 하는 단지나 장독 등 옹기제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하북면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통도사가 있어 예부터 관광객들이 많이 찾던 지역이다. 오히려 최근 들어 지역발전이 더딘 낙후지역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인근 울주군 삼남면에 있는 삼성전관(지금은 삼성SDI로 바뀌었다) 생산라인이 줄어들면서 종사자가 격감한 원인도 있다. 또 통도사 인터체인지가 시 경계지역까지 옮겨간 것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어찌됐든 하북면의 두 사찰, 통도사와 내원사는 양산의 이름을 국내에 널리 알린 관광 아이콘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름이면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평소에도 단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양산은 이처럼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통팔달의 교통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전략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음은 아쉽다. 청정 배내골과 함께 낙동강 하구 자전거길 등을 연계한 테마형 관광벨트의 조성이 체계적으로 조성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41차 본지 지면평가위원회 회의가 지난달 26일 주진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는 총 11회분 (474호 4월 16일자~484호 6월 25일자)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으며, 노상도 위원장을 포함한 7명의 위원과 본사 박성진 편집국장이 참석해 지면에 대한 평가와 향후 과제에 대한 심도 깊은 의견을 나눴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은 웅상체육공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더불어 시에서 추진하는 관급공사의 전반적인 실태에 대해 점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시에서 보조금을 받아 진행하는 행사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나 문제점이 있으면 따끔한 지적과 함께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평산동 이마트 입점과 관련한 다양한 입장을 공평히 다뤄줄 것을 요구했다.
닭고기의 영양 성분 닭고기의 영양가는 쇠고기보다 단백질이 많아 단백질 21%, 지방 4.8%, 무기질 0.6%, 철 1.2mg%, 칼슘 4mg%, 인 302 mg%, 비타민A1 401 I.U., 열량은 126kcal가 나며, 비타민 B2가 0.15mg%로 특히 많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 메티오닌, 리신 등 필수 아미노산이 쇠고기보다 많다. 지방은 쇠고기에 비해 가늘고, 연해 소화흡수가 잘된다. 지방이 근육 섬유 속에 섞여 있지 않아 맛이 담백하다. 부위에 따라 빛깔과 성분이 달라서 가슴 부분은 살이 희고, 지방이 적으며, 근육 섬유가 연해 맛이 담백하다. 다리 부분은 살이 붉고, 철분 함량이 많으며, 콜라겐이 많고, 독특한 풍미를 지닌다. 닭고기가 맛있는 것은 글루탐산이 있기 때문이며, 여기에 여러 가지 아미노산과 핵산맛 성분이 들어있어 강하면서도 산뜻한 맛을 낸다. 부위별 특징과 적합한 조리용도
친구와 함께 빛나는 이밤 친구과 함께 여름밤 동산장성길의 매력을 느끼기 위해 행사장을 찾은 문정순(46, 어곡동) 씨와 이향(46, 북부동) 씨는 오늘 행사로 우정을 위력을 실감했다. 문 씨는 오늘 행사소식을 듣고 혼자서라도 가려다가 친구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더니 마침 이 씨도 같이 가자고 연락하려던 참이었단다. 이 씨는 “오늘 행사에 오려고 준비하고 친구에게 연락하려던 참에 마침 친구가 전화 와서는 ‘야 야간산행 가자’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간다’고 신나게 외치고 함께 왔다”며 “역시 친구라서 그런지 마음이 이렇게 잘 통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문 씨는 “친구와 함께 산길도 걷고 음악제도 즐기면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어 기쁘다”며 “오늘밤 제대로 즐기고 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양산시민신문과 함께라면 어디든 간다 열심히 달빛음악제 행사장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던 와중 어디선가 양산시민신문이라는 말이 들렸다. 양산시민신문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는 김선미(46, 물금읍) 씨와 신소희(46, 물금읍) 씨는 오늘 행사도 신문을 보고 찾았단다. 오늘 행사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양산시민신문의 열성적인 팬 답게 지난 추억에 미치다 콘서트에서 마성의 미성으로 콘서트장을 뜨겁게 달군 가수 박정수의 무대가 기대된단다. 김 씨는 “지난번 추억에 미치다 콘서트에서 멋진 무대를 보여준 박정수 씨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된다”고 말했다. 신 씨 또한 “지난번 콘서트와 마찬가지로 이번 달빛음악제도 무척 기대된다”며 “앞으로도 양산시민신문이 주최하는 행사는 믿고 참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동생 손잡고 장성길 매력 속으로 모습을 담기 위해 여기저기 시선을 움직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중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산길을 오르는 남매를 만났다. 알고 보니 동산장성길을 직접 손으로 일군 백상탁 산림조합장의 자녀들. 아빠를 닮아서인지 아들 백동욱(14, 남부동) 군 또한 산을 오르는 것을 즐긴다고. 평소 아빠와 둘이 산을 오르지만 오늘은 기어코 엄마와 동생을 설득해 함께 왔단다. 백 군은 “오늘은 코스도 별로 힘들지 않고 밤에 숲을 걸을 수 있다는 생각에 엄마와 동생도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아 같이 오자고 설득했어요”라며 “흔쾌히 따라와주셔서 기분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오빠 덕에 일기 쓸 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백은서(10, 남부동) 양은 “밤에 산길을 걷고 또 산에서 하는 음악제 본 친구들은 거의 없을걸요”라며 “오늘 일기는 특별한 일기가 될 것 같아요”라고 웃었다. 우리는 아빠와 아들 달빛음악제가 한창인 와중 한쪽 구석에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연두색 커플티가 눈에 띄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지난해 양산마라톤대회 참가 기념티. 평소 시에서 하는 행사라면 빠짐없이 참석한다는 김현철(40, 중부동) 씨는 오늘도 행사가 있는 것을 알고 아들과 함께 참여했단다. 김 씨는 “평소 다양한 행사에 참여해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제는 처음”이라며 “오늘 아들과 함께 값진 경험을 한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아빠의 무릎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던 아들 김태원(9, 중부동) 군 또한 “처음 산길을 오를 때는 조금 힘들어서 아빠에게 투정도 부렸는데 도착하니 이쁘고 재밌어요”라며 “오늘 엄마가 함께 못 와서 아쉽지만 집에 가서 오늘 이야기 전부 다 해줄 거에요”라고 말했다.
정다운 사람과 산길을 걷고 여름밤 무더위도 날려주는 흥겨운 음악회가 펼쳐졌다. 양산시민신문(대표 김명관)이 주최하고 양산시와 양산시산림조합이 후원하는 ‘동산장성길 걷기와 달빛음악회’가 지난 21일 오후 6시 북부동 하신기마을 주차장에서 열렸다. 행사 전 가랑비가 오락가락했던 궂은 날씨였음에도 하신기마을 주차장에는 행사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열기를 뿜었다. 이번 행사에는 나동연 시장과 윤영석 국회의원을 비롯해 정재환 도의원, 이용식 시의원 등과 450여명이 훌쩍 넘는 시민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다. 시민들은 장성길 등반 전 양산시보건소에서 준비한 벌레 퇴치제를 뿌리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신기 분기점에서 출발해 선선한 나무 그늘 밑을 1시간가량 걸어가자 달빛음악회 장소인 양산대 분기점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좋은 자리를 잡고 두부김치와 김밥, 막걸리 등 다양한 먹거리를 즐기며 기념사진을 찍는 등 추억을 남겼다. 오후 7시 30분이 되자 본사 김명관 대표의 사회로 본격적인 달빛음악회가 시작됐다. 첫 순서로 양산시립합창단 남성중창단이 ‘푸니쿨라’, ‘오 솔레미오’, ‘아빠의 청춘’ 등을 열창하며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이어 매강 권귀하 시인이 오세영 시인의 ‘6월’과 양산출신 손남숙 시인의 ‘조응’을 낭송하며 음악회 참가자들에게 ‘치유’의 시간을 선사해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어 정재환 도의원과 나동연 시장, 윤영석 국회의원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음악회에 참여한 시민을 위해 숨겨왔던 노래 실력을 선보였다. 이들의 무대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즐겼다. 행사 중간에는 달이 떠올라 탄성이 터지기도 했다. 달빛음악회의 마무리는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으로 유명한 가수 박정수가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는 자신의 대표곡과 ‘무조건’, ‘땡벌’ 등을 부르며 박수를 받았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한윤미(35, 북부동) 씨는 “행사 직전에 잠깐 비가 와 올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다”며 “이번 행사로 양산에 이렇게 좋은 둘레길이 있다는 걸 알았고 앞으로도 오늘같이 건강과 휴식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문화행사가 많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참여 소감을 말했다. 김명관 대표는 “이번 행사를 위해 산림공원과와 보건소, 산림조합, 해병대 전우회, 여성단체, 양산등산교실 회원 등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셔서 성황리에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며 “시민의 건강증진과 문화정서에 도움이 되는 음악회였길 바라고 각 계 각층이 한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막걸리를 김치냉장고에 넣어서 한 번 드셔보세요. 원래 유통기한이 20일인데 김치냉장고에 보관하시면 한 달도 충분히 가능해요” 맛있게 막걸리를 마시는 방법을 물었더니 김민성 대표는 대뜸 ‘김치냉장고’에 막걸리를 보관하라 귀뜸 한다. 김치와 마찬가지로 발효음식이니까 보관에는 김치냉장고가 최고라는 설명이다. 단, 별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막걸리에 한해서다. 김 대표가 강력 추천하는 막걸리 안주는 홍어회다. 홍어회의 톡 쏘는 자극이 막걸리의 알싸한 맛과 묘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물론 홍어회 가격이 그다지 ‘서민적’이지 않다는 것이 단점. 누가 뭐래도 막걸리는 서민의 술이다. 그렇다면 안주도 서민적이어야 할 것. 김 대표도 이런 차원에서 막걸리와 어울리는 안주로 ‘파전’을 꼽았다. “설명할 순 없지만 비오는 날 막걸리와 파전의 궁합은 희한하게도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요. 사실 굳이 파전이 아니더라도 전이라면 어떤 재료라도 잘 어울리죠. 전 말고도 두부김치나 묵 종류도 막걸리와는 환상의 호흡이고요” 슬슬 장마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예전만 못하다지만 그래도 막걸리의 계절 아니겠는가. 파전 한 판에 무더운 여름철 피로를 씻어 보자. 물론 ‘과음’은 금물. 먹다 남은 막걸리는 김치냉장고에 보관하는 것도 잊지 말자.
3대가 지켜온 70년 전통 ‘물금막걸리’ 본연의 맛 고집하며 뚝심 있게 한길 첨가물 넣지 않은 전통방법이 ‘비법’ 막걸리.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우리나라 고유한 술의 하나. 맑은 술을 떠내지 아니하고 그대로 걸러 짠 술로 빛깔이 흐리고 맛이 텁텁하다’고 정의한다. 실제 막걸리는 이름 그대로 규칙 없이 대충 지금 바로 막 걸러 마시는 술이다. 비록 ‘규칙 없이 대충 막 걸러 마시는 술’이지만 고려시대 부터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을 마셨다 하는 기록을 보면 적어도 600년은 넘은 역사를 가진 ‘전통주’다. 전통 음식이 그러하듯 막걸리 역시 지역마다 제조법과 그 맛이 조금씩 다르다. 과거 ‘주막’에서 팔던 막걸리도 있었지만 집집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술을 빚다 보니 맛도 다를 수밖에. 현재 4~50대 이상 세대라면 어린 시절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오는 술심부름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정도로 우리 생활과 함께해온 술이다. 물금읍 물금리 750-1번지에 위치한 ‘물금막걸리’ 역시 역사가 깊다. 김민성(42) 대표가 운영하는 물금막걸리는 현재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김 대표의 조부 김유전 씨가 1946년 부산시 금정구 에서 시작한 양조장이 6.25전쟁 직후 양산으로 옮겨와 김 대표의 부친 김희도, 숙부 김정도 씨를 거쳐 지금에 이어지고 있다. 소주ㆍ맥주에 밀린 막걸리 대형업체와 전쟁까지 ‘2중고’ 하지만 70년이 넘는 전통이 결코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600년 넘는 역사의 막걸리가 서서히 우리네 술자리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소주와 맥주가 어느새 ‘국민 술’로 자리매김했고, 막걸리는 가끔 마시는, 특별한 날 생각나는 술이 되고 있다. 전통은 그냥 옛것 정도로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물금막걸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지역에서 열리는 동네잔치에 당연히 주인공이었던 ‘막걸리’는 소주와 맥주에 점차 자리를 양보해야 했고, 낮은 도수의 소주가 출시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여기에 대형 양조업체와의 경쟁으로 전통 막걸리 업체가 속속 문을 닫고 있는 현실은 지역 막걸리 업계를 더욱 어둡게 한다. 실제 양산지역만 해도 웅상지역에서 전통을 자랑하던 업체가 지난해 결국 문을 닫았다. 물론 아직 상북과 하북지역에서 좋은 품질을 자랑하는 막걸리 업체가 존재하지만 이들 역시 ‘마을’이라는 판매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전통과 시장성(판매 영역)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전통 막걸리로써 양산을 대표하는 막걸리는 ‘물금막걸리’가 유일한 셈이다. “솔직히 대형업체들이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전통 막걸리가 버텨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희 물금막걸리도 70년이 넘는 전통을 갖고 있지만 사실 이제는 지역의 마니아들만 즐기는 수준입니다”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각종 매체를 통해 광고를 거듭하는 대형 주조업체, 특히 부산, 경남지역을 바탕으로 규모를 확대해가는 대형 양조업체에 밀려 물금막걸리도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웰빙’ 열풍에 세계 누비던 막걸리 2년 반짝 열풍 이후 계속 내리막길 막걸리도 좋은 시절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3~4년 전 ‘웰빙(well-being)’ 열풍이 불면서 세계 시장에서 막걸리의 효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막걸리의 효모, 효소, 젖산균 등은 막걸리를 건강식품 대열에 올려놨고, 항암효과가 있다는 한국식품연구원의 연구 결과는 막걸리 열풍에 불을 붙였다. 김 대표를 포함해 직원이 2명뿐인 물금막걸리. 막걸리 열풍에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랐다. 김 대표는 잠을 쪼개가며 배달 트럭을 몰았다. 24시간 양조장 불빛은 꺼지지 않았지만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대형업체와의 경쟁에 힘든 현실도 이 시기만큼은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모처럼 ‘호기’를 달리던 막걸리 열풍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식어버렸다. 한류열풍에 막걸리 인기까지 겹쳐 일본에서 함께 일을 해보자는 제의까지 들어왔지만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막걸리 열풍이 불 때는 솔직히 괜찮았죠. 너무 바빠서 술을 만들어내지도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공장이 작다보니 더 그랬죠. 그런데 이마저 2년이 채 못 돼 숨이 죽더라고요. 지금이요? 지금도 막걸리 시장은 계속 내리막이에요” “그래도 전통의 맛은 지켜야죠” ‘변종’ 거부하며 ‘본연의 맛’ 강조 시들어버린 막걸리 열풍은 막걸리 업계 전반에 걸쳐 어려운 경영현실로 다가왔다. 각 업체들은 생존 방법 찾기에 나섰고, 소주가 알코올 도수를 낮추듯 막걸리는 단맛을 높였다. 여기에 각종 향을 첨가하고 전통 용기를 벗어나 ‘캔(can)’에 담긴 막걸리를 내놓기도 했다. 김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종’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 대표 주변에서도 막걸리의 단맛을 더 내기 위해 이런 저런 첨가물을 넣어 보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 대표에겐 소귀에 경 읽기. ‘막걸리 본연의 맛’을 고집하는 김 대표에게 이들은 ‘변종’일뿐이다. “우리 막걸리 업계가 자꾸만 변종을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적어도 저희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막걸리는 막걸리다워야 하는 거잖아요. 막걸리가 막걸리 맛이 나야지 다른 맛이 나면 그게 막걸리입니까? 젊은 세대, 여성분들의 기호에 맞추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막걸리는 ‘막 걸러낸’ 전통의 그 맛이 나야죠” 김 대표는 막걸리 전통의 맛을 ‘버틸 수 있는 힘’이라 표현했다. 대형 양조업체의 다양한 퓨전 막걸리의 파상공세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전통의 맛’이라는 것이다. 김 대표 역시 시대의 변화에 맞춰, 달라지는 소비자 입맛에 맞춰 막걸리도 변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 변화가 ‘막걸리 본연의 맛’을 해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큰 바람은 없습니다. 공장을 키우고 판매처를 확대시키는 것도 별로 욕심나지 않아요. 그저 저희 막걸리를 아껴주시는 분들과 좀 더 오래 함께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오래 함께하기 위해서는 지나친 음주는 금물이겠죠? 하하~! 끝으로 굳이 저희 물금막걸리를 홍보하자면, 아직 물금막걸리를 맛보지 못한 애주가 여러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단 한 번 드셔보십시오. 이 말로 저희 제품 자랑을 대신하겠습니다” 큰 욕심 없이, 지금 그 자리에서 이웃과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김 대표의 소망. 어쩌면 김 대표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받으러 가던 그 옛날 우리의 추억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